
이어도사나, 이어야 사나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 이어도사 옮김
프린터는 내가 보내지 않은 문서를 먼저 뱉어냈다. 2027년 4월, 수요일 오전 7시 48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의 24시간 코인 빨래방 옆 공유오피스는 늘 그 시간에 비슷한 소리를 냈다. 빨래방 쪽에서 건조기 돌아가는 둔한 진동이 벽을 타고 넘어오고, 오피스 안에서는 천장형 에어컨이 잠깐씩 켜졌다 꺼졌다 했다. 나는 출근 전에 30분 정도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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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솥은 다 식은 뒤에도 한동안 김 냄새를 품고 있었다. 2026년 12월, 전북 익산 영등동의 18평 아파트. 저녁 9시 30분쯤 퇴근해 부엌 불을 켰을 때, 나는 분명 아침에 예약 취사를 맞춰 두지 않았다는 걸 먼저 확인했다. 전기밥솥의 화면은 꺼져 있었고, 뚜껑 가장자리에는 손으로 만지면 바로 마를 정도의 얇은 물방울만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방금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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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는 젖어 있는데 세탁기는 멈춰 있었다. 2027년 1월, 대구도 부산도 아닌 경남 김해 장유동의 원룸에서 나는 새벽 5시 50분에 눈을 떴다. 알람보다 먼저 깬 건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얇은 벽 때문에 옆집 소음은 자주 들렸지만, 내가 쓰는 드럼세탁기 소리는 다르게 울렸다. 낮게 긁는 소리 뒤에 물이 한 번 모였다가 빠지는, 짧고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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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의 안쪽 솔기는 사람을 금방 배신했다. 겉에서는 멀쩡해 보여도 겨드랑이 밑이나 옆선 3cm쯤에서 먼저 틀어졌다. 2026년 2월의 밤,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정동 수선집에서 나는 그런 부분을 하루 종일 들여다봤다. 오후 8시 10분이면 셔터를 반쯤 내리고 마지막 옷에 다리미를 댔다. 그 시간의 가게는 조용했지만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스팀이 식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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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보는 매일 같은 모양으로 구겨지지 않았다. 2025년 9월, 청주 흥덕구 복대동의 24평 아파트에서 나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앉아 밥을 먹는 날이 많았다. 이름은 한수민이고, 34살이다. 중학교 행정실에서 일한다. 학기 초가 지나도 공문은 줄지 않았고, 집에 오면 어깨부터 먼저 내려앉았다. 엄마는 두 달 전부터 허리 때문에 우리 집에 와 있었다.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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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8분, 인천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부천 중동의 아파트에서 가장 늦게 마르는 곳은 욕실이 아니라 싱크대 아래였다. 내 이름은 이서후다. 2026년 3월, 이사 온 지 12일째였고, 나는 그 사실을 이 집의 냄새보다 먼저 배웠다. 아침에 물을 한 번만 써도 저녁까지 걸레 냄새가 남았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배수관이 오래돼서 그렇다고 했다. 아파트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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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기 18분 전이면 창문이 먼저 젖었다. 2044년 6월, 군산 월명동의 오래된 양장점 2층 작업실에서 나는 그 시간을 거의 틀리지 않고 맞혔다. 하늘은 아직 밝은데 유리 안쪽 가장자리에만 얇은 물막이 올라왔다. 시에서 보급한 미세기후 필름이 창틀에 붙은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 필름은 바깥 공기보다 조금 먼저 습도와 전하 변화를 읽었다. 동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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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은 사람보다 먼저 길을 기억했다. 2043년 5월, 안동 풍천면의 종묘 온실은 오전 7시만 되어도 유리 지붕 아래가 환해졌다. 나는 출근 카드를 찍지 않는다. 대신 입구 작업대 위에 놓인 얇은 판에 손등을 3초 올린다. 체온과 땀 성분으로 오늘 내 몸 상태를 읽고, 어떤 구역에 들어가도 되는지 결정하는 장치였다. 종자 보존동에서 일한 지 6년째인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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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사람의 목소리는 대개 잊히지 않고, 요즘은 배송된다. 2038년 2월, 목포 북항의 기상 관측 부표 관리동은 오후 3시만 지나면 바람 소리가 벽을 얇게 만들었다. 나는 2층 작업대에서 회수 드론들의 진흙 얼룩을 닦고 있었다. 드론마다 바다 냄새가 조금씩 달랐다. 가까운 연안만 돌고 온 기체는 젖은 밧줄 냄새가 났고, 먼 수온 경계선까지 갔다 온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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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이 사람보다 먼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2046년 7월, 오후 5시 40분. 세종시 금강 남쪽의 공중농원 3동은 퇴근 직전마다 조금씩 느려졌다. 천장 유리 위로 지나가는 구름이 빛을 가리면, 재배대 12줄에 매달린 잎채소들이 동시에 잎의 각도를 바꿨다. 자동이라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 움직임을 볼 때마다 누가 잠깐 어깨를 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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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빠진 뒤의 갯벌은 늘 같은 색이 아니었다. 2041년 4월, 전남 신안군 비금도 서쪽 염전은 해가 올라오기 전 30분 동안만 회색과 분홍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나는 그 짧은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새벽 5시 40분이면 작업장 뒤 계측대부터 확인했다. 오늘도 수면 높이, 염도, 미세조류 농도까지 숫자는 가지런했다. 가지런한 날은 오히려 마음이 덜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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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칫솔은 항상 왼쪽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2024년 4월의 목요일 오전 6시 12분, 천안 서북구 불당동 오피스텔 12층 내 집 세면대 앞에 섰을 때 제일 먼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거울 속 내 얼굴이 아니라 칫솔모가 오른쪽 벽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혼자 산다. 이름은 한서진, 서른셋이다. 출근 준비는 거의 자동이다. 물을 올리고, 세수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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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마다 비어 있는 반찬통 1개가 꼭 돌아왔다. 2025년 11월, 오후 7시 15분. 창원 성산구의 회사 셔틀버스에서 내리면 나는 늘 같은 길로 아파트 단지 안 상가를 지난다. 1층 반찬가게 유리 안에는 멸치볶음, 무생채, 계란말이가 네모난 스테인리스 통에 담겨 있고, 그날그날 할인 스티커가 붙는다. 혼자 사는 지 2년째가 되자 저녁을 고르는 일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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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꽂이에 꽂힌 우산은 주인을 닮는다고, 나는 오래 믿어 왔다. 2026년 7월, 울산 남구의 작은 회계사무실에서 퇴근 준비를 하던 오후 6시 40분에도 그 생각을 했다. 접는 방식, 손잡이의 마모, 빗물이 떨어지는 속도까지 다 다르다. 내 우산은 검은색 3단 우산이고, 밴드가 늘어나 늘 한쪽으로 비뚤게 감겼다. 그런 건 아침에 급하게 접은 사람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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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은 같은 시간에 두 번 찍힐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그랬다. 2027년 7월 오전, 수원 행궁동의 골목 카페는 8시 30분쯤부터 손님이 몰렸다. 출근 전에 테이크아웃을 해 가는 사람들, 근처 공방 문을 열기 전에 들르는 사람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는 사람들. 나는 바 테이블 끝자리에서 주문을 받고 컵 뚜껑을 닫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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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가 들어오기 12분 전, 대합실 바닥에는 늘 마른 발자국이 먼저 생겼다. 2032년 1월, 인천 월미바다역 오전 5시 18분. 역사 안은 난방을 틀어도 유리 벽 쪽부터 식었다. 매표 창구 옆 안내데스크에 앉은 서희재는 장갑을 벗고 출근 확인표에 시간을 적었다. 5시 17분. 1분 늦은 시계는 어제도 그제도 그대로였지만, 아무도 고치지 않았다. 이 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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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책을 빌리러 오는 시간과 책이 사람을 고르는 시간은 대체로 겹치지 않았다. 2031년 6월, 전주 완산구의 시립기록도서관은 오전 8시 30분에 문을 열었다. 정소라는 8시 10분이면 늘 지하 서고에 먼저 내려갔다. 사서들은 개관 전 20분 동안 반납된 자료를 분류하고, 서가 온도를 확인하고, 4층 열람실 창문 걸쇠를 점검했다. 그리고 소라는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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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명동 지하상가 관리실의 벽시계는 매주 수요일마다 1분 늦었고, 그 1분은 늘 시계의 앞면이 아니라 뒷면에서 시작됐다. 2029년 3월, 오후 4시 10분. 관리실 안은 전기포트 끓는 소리와 복사기 팬 돌아가는 소리로 적당히 차 있었다. 한서진은 분실물 대장을 무릎 위에 펴놓고 볼펜 끝으로 줄을 맞추고 있었다. 투명 우산 2개, 어린이 운동화 한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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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주문진수산시장에서는 2028년 11월에도 생선보다 먼저 저울이 깨어났다. 최다온은 새벽 4시 20분에 점포 셔터를 반쯤 올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 타일은 밤새 식어 있었고, 스티로폼 상자 옆에 둔 고무장화는 한 짝이 약간 돌아가 있었다. 그는 늘 하던 순서대로 불을 켜고, 플라스틱 대야를 씻고, 칼집에서 칼을 꺼내 물에 적셨다. 마지막은 저울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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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12시가 되기 3분 전이면, 광주 북구 용봉동의 시립수영장은 가장 조용해졌다. 물속에 사람이 14명이나 들어가 있는데도 그랬다. 발차기 소리는 줄어들고, 레인 줄에 닿는 손바닥 소리도 뜸해졌다. 다들 벽에 한 번씩 붙어서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전광판에는 현재 시각, 수온 27도, 그리고 오늘의 급수 예보가 번갈아 떴다. 오전에는 보통 '약함'이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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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보다 먼저 사람의 숨이 밀려오는 시간이 있었다. 대구 2월 저녁 6시 20분, 수성구의 작은 인쇄소 2층 교정실은 히터를 세게 틀어도 종이 끝이 늘 차가웠다. 나는 접수된 원고 묶음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잠깐 열을 옮기는 버릇이 있었다. 종이는 금방 식었고, 손은 잉크 냄새를 오래 붙들었다. 그날도 마감 40분 전이었다. 제본실에서 올라온 박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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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9월, 늦은 저녁 10시 20분쯤이면 제주시청 앞 독립서점 계산대에는 종이 냄새보다 손끝의 열이 먼저 남았다. 나는 마감 10분 전마다 포장대 위에 굴러다니는 수정테이프를 제자리에 세워 두는 버릇이 있었다. 눕혀 두면 투명한 몸통 안에서 끊긴 흰 테이프 끝이 자꾸만 보여서. 누구는 그런 걸 왜 신경 쓰냐고 했지만,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잘못 붙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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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면의 생활도자기 공방은 5월 저녁 8시가 지나면 유약 냄새보다 사람 손의 온도가 오래 남았다. 나는 마감 30분 전마다 진열대 맨 아래 칸의 유리그릇들을 다시 닦았다. 닦을수록 지문은 더 잘 보였고, 형광등 불빛은 얇은 금선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금이 간 건 불량이라서 빼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그릇을 제일 오래 쥐고 있게 됐다. 손바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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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앙시장, 8월 저녁 7시쯤, 복숭아는 가장 쉽게 멍이 들고 사람은 가장 쉽게 말을 아꼈다. 나는 중앙시장 안쪽 과일가게에서 하루에 6시간씩 계산대를 봤다. 에어컨은 천장에 달려 있었는데도 계산대까지는 시원함이 잘 오지 않았다. 손등은 늘 끈적했고, 봉투를 벌릴 때마다 손가락 끝에 종이 가루가 묻었다. 복숭아 상자는 계속 들어왔다. 연분홍 종이 완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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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오래된 빌라 5층, 10월 밤 9시 40분쯤이면 복도에는 늘 같은 냄새가 찼다. 따뜻해진 철문, 누군가 막 접어 넣은 셔츠의 섬유유연제, 그리고 아주 잠깐 스치는 국물 냄새. 나는 그 시간이 되면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갔다. 일부러 맞춘 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문을 잠글 때마다 내 손은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맞은편 5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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