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수정테이프

1챕터 · AI 시작

제주 9월, 늦은 저녁 10시 20분쯤이면 제주시청 앞 독립서점 계산대에는 종이 냄새보다 손끝의 열이 먼저 남았다. 나는 마감 10분 전마다 포장대 위에 굴러다니는 수정테이프를 제자리에 세워 두는 버릇이 있었다. 눕혀 두면 투명한 몸통 안에서 끊긴 흰 테이프 끝이 자꾸만 보여서. 누구는 그런 걸 왜 신경 쓰냐고 했지만,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잘못 붙인 문장을 가리는 물건을 똑바로 세워 두어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날도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나서 출입문 옆 작은 입간판을 접어 두려는데, 문 안쪽 게시판에 붙은 쪽지 하나가 눈에 걸렸다. 오늘 오전에 들어온 중고 시집 문의였다. 제목 아래 적힌 번호 끝 4자리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1128. 낮에 전화를 받고 받아 적을 때, 옆에서 책등을 정리하던 남자가 그 숫자를 한 번 따라 읽었기 때문이다. “1128이요?” 하고. 나는 그때 고개도 들지 않고 “네, 일단 오시면 상태 보시고요”라고 답했다. 남자는 더 묻지 않았고, 대신 시집이 꽂힌 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서점 조명은 밤이 되면 노랗게 가라앉는데, 그 사람 셔츠 소매만 이상하게 푸르게 보였다. 이름은 계산할 때 알았다. 민준. 회원 적립을 하려면 이름을 물어야 해서, 나는 늘 같은 순서로 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는 카드 대신 휴대폰을 내려다본 채 “한민준이요” 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조금 마른 편이었다. 책 두 권을 샀다. 시집 1권, 식물 산문집 1권. 봉투가 필요 없다고 해서 나는 책 위에 얇은 종이띠만 둘러 주었다. 손이 스쳤다고 할 만한 일은 없었다. 다만 종이띠 끝을 접어 넣는 동안, 그가 계산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급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그런 리듬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 손톱을 봤다. 짧게 깎여 있었고, 검지 옆에만 하얀 종이 먼지가 묻어 있었다. 민준이 문을 열고 나갈 때 남긴 체온이 아니라, 문이 닫힌 뒤 계산대 앞에 남은 침묵이 더 선명했다. 나는 괜히 포장대 위를 정리했다. 파란 수정테이프를 세우고, 영수증 뭉치를 맞추고, 방금 그가 서 있던 바닥의 의자 자국까지 눈으로 쓸었다. 뒤쪽 창고에서 나오던 사장 지희가 아직 안 갔냐고 물었다. 지희는 앞치마를 풀며 내 표정을 잠깐 보더니, 아까 그 손님이 책보다 번호를 더 오래 보던데 아는 사람이냐고 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려는 순간, 내가 그 사람 이름을 속으로는 벌써 세 번이나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민준. 한민준. 지희는 냉장고도, 현관도 없는 이 좁은 가게에서 늘 남의 침묵을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출입문 잠금까지는 7분 남았다. 게시판의 쪽지는 아직 떼지 않았고, 번호 끝 4자리는 여전히 보였다. 다시 오면 연락이 필요 없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다시 오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걸 수도 있었다. 이상한 건, 쪽지에 적힌 잉크는 분명 검은색인데도 내 눈에는 자꾸 파랗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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