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밥솥 김
1챕터 · AI 시작
밥솥은 다 식은 뒤에도 한동안 김 냄새를 품고 있었다. 2026년 12월, 전북 익산 영등동의 18평 아파트. 저녁 9시 30분쯤 퇴근해 부엌 불을 켰을 때, 나는 분명 아침에 예약 취사를 맞춰 두지 않았다는 걸 먼저 확인했다. 전기밥솥의 화면은 꺼져 있었고, 뚜껑 가장자리에는 손으로 만지면 바로 마를 정도의 얇은 물방울만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방금 막 밥을 푼 집처럼 단내가 났다. 쌀이 익을 때 나는 냄새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더운 냄비 주변에만 잠깐 고였다가, 창문 틈이나 후드로 빠져나간다. 그걸 아는 건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적어서였다. 오래 맡을 기회가 없으니까 오히려 분명히 알았다.
내 이름은 공예진이고, 서른네 살이다. 익산의 종합병원 원무과에서 3년째 일하고 있다. 접수창구는 사람 얼굴을 많이 보지만, 정작 집에 돌아오면 내가 본 얼굴들이 얼마나 빨리 지워지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집안의 자잘한 순서를 잘 외웠다. 신발을 벗고 오른쪽 벽에 기대 놓는 것, 코트를 식탁 의자 등받이에 거는 것, 가방에서 사원증을 빼 서랍 첫 칸에 넣는 것. 그날도 다 똑같이 했다. 다른 게 있다면 엄마가 오후에 다녀갔다는 메모뿐이었다. 식탁 위 약 봉투 아래 눌린 종이에, 반찬 넣어 둠. 밥은 하지 마. 추움.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엄마는 문장을 짧게 쓴다. 말로 할 때보다 글로 쓸 때 더 무뚝뚝하다. 나는 냉장고 대신 싱크대 위를 먼저 봤다. 스테인리스 반찬통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멸치볶음, 하나는 무나물이었다. 둘 다 아직 차가웠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자 세 번 만에 받았다. 텔레비전 소리가 뒤에서 작게 났다.
"왔냐. 반찬 봤어?"
"응. 근데 엄마, 밥 했어?"
"내가 왜 네 집에서 밥을 하니. 반찬만 놓고 왔지."
"밥 냄새가 나서. 아까 다녀갔지?"
"6시 조금 전에 갔어. 너 또 안 먹고 다니지 말고."
엄마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기침을 한 번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화면 없는 밥솥을 봤다. 콘센트는 꽂혀 있었지만, 예약 표시도 없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안쪽은 비어 있었다. 내솥 바닥에 눌어붙은 자국도 없고, 물이 말라 남는 하얀 선도 없었다. 깨끗했다. 아침에 설거지해 엎어 둔 그대로처럼. 그런데 뚜껑 안쪽 금속판에만 아직 작은 김방울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걸 닦아 냄새를 맡았다. 물 냄새 말고는 없었다. 이상한 건 늘 그럴 때 시작됐다. 눈으로는 분명한데, 코로는 놓치는 순간.
다음 날 점심 무렵, 병원 휴게실에서 도시락을 먹다가 그 얘기를 꺼냈다. 맞은편의 강해진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웃었다. 해진은 나보다 다섯 살 어리고,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유난히 생활 소음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누구 키보드가 어떤 박자로 울리는지, 어느 복사기가 종이를 한 장씩 늦게 뱉는지 같은 걸 안다.
"엄마가 잠깐 밥 해놓고 잊은 거 아니에요?"
"안 했대. 밥솥도 비어 있었어."
"그럼 윗집?"
"우리 집에서 났어. 바로 코앞에서."
해진은 한참 나를 보다가 물병 뚜껑을 돌렸다.
"언니네 집 가면, 부엌 시계 아직도 7분 빠르죠?"
"어. 안 고쳤어."
"그럼 언니가 어제 집에 들어간 시간이 9시 30분은 아닐 수도 있겠네."
나는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하려다가 멈췄다. 사원증 출입 기록은 남는다. 그런데 어제는 퇴근 전에 응급실 수납 때문에 창구를 두 번 비웠고, 휴대폰 배터리는 3퍼센트라 지하철에서 꺼졌다. 집에 도착해 시계를 본 기억은 있는데, 벽시계였는지 전자레인지였는지 금방 흐려졌다. 해진은 내가 말을 잇지 않자 웃음을 거두었다.
"아니, 그냥. 밥 냄새라는 게 이상하게 오래 남잖아요."
그 말은 맞았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는 냄새와 실제로 방금 난 냄새는 달랐다. 나는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틀 뒤 토요일 저녁, 엄마가 다시 반찬을 가져왔다. 이번에는 내가 있는 시간에 오겠다고 미리 말했다. 엄마는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린 채 부엌에 서서 반찬통 뚜껑을 열어 놓고도 집 안을 한 번도 둘러보지 않았다. 원래는 꼭 한마디씩 했다. 먼지가 많다, 수건이 젖어 있다, 컵이 왜 두 개냐 같은 말. 그런데 그날은 수도꼭지 아래 놓인 행주만 보다가 물었다. 너 요즘 집에서 밥 먹고 가니. 거의 못 먹지, 왜. 아침에 왔을 때도 냄새가 좀 났어. 나는 그제야 엄마 쪽을 봤다. 엄마는 내 얼굴을 안 보고 밥솥 쪽만 봤다. 무슨 냄새. 전자레인지 화면에는 8시 17분이 찍혀 있었다. 우리 집 시계들은 전부 제각각인데, 그 숫자만 이상하게 또렷했다. 엄마는 낮게 말했다. 막 퍼낸 밥 냄새. 근데 안을 열어 보니까 비어 있더라. 그 말이 끝난 직후, 거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내 귀에는 누가 밥주걱으로 내솥 바닥을 한 번 긁는 소리가 들렸다. 짧고 마른 소리였다. 동시에 코끝에는 아무 냄새도 없었다. 엄마는 아직 밥솥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나는 방금 들은 소리를 엄마도 들었는지 묻기 전, 내가 그 소리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부터 생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