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상자

1챕터 · AI 시작

대전 중앙시장, 8월 저녁 7시쯤, 복숭아는 가장 쉽게 멍이 들고 사람은 가장 쉽게 말을 아꼈다. 나는 중앙시장 안쪽 과일가게에서 하루에 6시간씩 계산대를 봤다. 에어컨은 천장에 달려 있었는데도 계산대까지는 시원함이 잘 오지 않았다. 손등은 늘 끈적했고, 봉투를 벌릴 때마다 손가락 끝에 종이 가루가 묻었다. 복숭아 상자는 계속 들어왔다. 연분홍 종이 완충재를 걷어내면 과육에서 단내가 올라왔고, 그 냄새가 박하사탕 냄새와 자꾸 섞였다. 박하사탕은 내 것이 아니라, 오후 5시만 넘으면 옆 진열대에 와서 상자 끈을 자르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 사람 이름은 윤서준이었다. 시장 상인회에서 여름 두 달만 쓰는 단기 인력이라고, 사장님이 한 번 설명한 적 있었다. 서준은 칼을 쓸 때 손목을 거의 꺾지 않았다. 무심해 보일 만큼 조심스러웠다. 끈이 풀린 상자를 들어 올릴 때도 상자 옆면을 먼저 눌러 보고, 무른 게 있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나무 받침 위에 올렸다. 덕분에 손님들은 종종 나보다 그에게 먼저 물었다. 그러면 그는 복숭아를 뒤집어 꼭지 쪽을 보고, 대답하기 전에 한 번 더 냄새를 맡았다. 내가 하루에 제일 많이 한 말은 "봉투 1장 더 드릴까요"였는데, 그 사람은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늘 조금 다른 말을 했다. 그래서 가게 문 닫기 30분 전쯤, 손님이 뜸해지면 나는 계산대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의 움직임을 귀로만 짐작하곤 했다. 테이프가 뜯기는 소리, 상자가 밀리는 소리, 박하사탕이 이 사이에서 부서지는 작은 소리. 그 사이사이에 아주 짧은 침묵이 있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침묵의 길이를 알 것 같았다. 그날 처음으로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금액을 찍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서준은 복숭아 1상자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상자 모서리에 눌린 자국이 1개 있었다. 그가 이거, 가져가실래요, 하고 묻자 나는 왜요, 하고 되물었다. 하나가 찍혀서 팔긴 좀 그렇다는 말이 돌아왔다. 사장님은 원래 그런 건 집에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도 대개는 사장님이나 아주머니들이 챙겨 갔고, 계산대 보는 내가 먼저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괜히 영수증 뭉치를 한 번 맞춰 놓았다. 서준은 상자를 내려놓지 않고 기다렸다. 땀에 젖은 티셔츠 소매가 팔에 붙어 있었고, 방금 냉장 창고를 다녀왔는지 손등만 조금 차가워 보였다. 나는 전 복숭아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하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여름이 오면 복숭아를 먹으려고 저녁을 줄이는 쪽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이 먼저 나왔다. 너무 쉽게 받으면 내가 오래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킬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스스로도 우스워서, 입안이 금세 말랐다. 서준은 아, 그래요, 하고 짧게 말했다. 실망했다기보다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사장님 누나인 정희가 뒤쪽에서 전표철을 들고 나오다가 우리를 번갈아 봤다. 서준 씨, 그 상자 아까부터 민아 주려고 남겨둔 거였지, 하는 말이 별 뜻 없이 떨어졌지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준도 웃지 않았다. 다만 상자를 안은 팔에 힘이 조금 들어간 게 보였다. 종이 상자 옆면이 손가락 자국대로 눌렸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오늘 오후 내내 그가 멀쩡한 상자들 사이에서 유독 이것만 계산대 옆 그늘에 따로 밀어 둔 걸 떠올렸다. 보고도 그냥 지나간 장면이, 너무 늦게 의미를 갖는 순간이 있었다. 정희는 전표철을 탁자에 놓으며 8시 20분에 택배 차 와, 그전까지 반품 빼야 해, 하고 말했다. 시장 바깥은 아직 밝은데 가게 안 형광등은 먼저 저녁이 와 있었다. 복숭아 냄새는 분명 달았고, 입안은 이상하게 박하처럼 서늘했다. 나는 복숭아를 받으면 오늘 집까지 들고 가야 했고, 받지 않으면 내일도 이 사람을 봐야 했다. 두 쪽 다 가벼운 일처럼 보였지만, 어느 쪽으로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 같았다. 택배 차가 오기까지는 20분. 나는 아직 네와 괜찮아요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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