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표의 온도

1챕터 · AI 시작

셔츠는 젖어 있는데 세탁기는 멈춰 있었다. 2027년 1월, 대구도 부산도 아닌 경남 김해 장유동의 원룸에서 나는 새벽 5시 50분에 눈을 떴다. 알람보다 먼저 깬 건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얇은 벽 때문에 옆집 소음은 자주 들렸지만, 내가 쓰는 드럼세탁기 소리는 다르게 울렸다. 낮게 긁는 소리 뒤에 물이 한 번 모였다가 빠지는, 짧고 규칙적인 소리였다. 어젯밤 11시쯤 분명히 운동복과 수건만 넣고 예약을 걸어 두었는데, 방문을 열자 다용도실 불은 꺼져 있었고 세탁기 표시창도 검게 식어 있었다. 그런데 문 안쪽 고무 패킹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방금까지 돌아간 것처럼. 나는 세탁기 문을 열어 봤다. 안에는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 회색 후드집업, 흰 수건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넣지 않은 옷이 두 벌 더 있었다. 회색 후드집업은 내가 가진 적 없는 크기였다. 팔이 길고 어깨선이 넓었다. 왼쪽 안쪽에 세탁표가 접혀 있었는데, 누군가 한 번 뜯었다가 다시 실로 대충 고정한 흔적이 보였다. 손으로 만져 보니 아직 미지근했다. 나는 잠깐 멈췄다. 새벽에는 사소한 계산이 잘 안 맞는다. 어젯밤 피곤해서 빨랫감을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살고, 지난달부터는 손님도 부른 적이 없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집주인에게 온 문자가 5시 32분에 와 있었다. "오늘 8시 전에 수도 점검 잠깐 들어갈 수 있어요?" 어제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새벽에 갑자기 보낸 메시지였다. 나는 답을 하지 않은 채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아 세탁표를 다시 펼쳤다. 30도 이하, 단독 세탁, 건조기 금지. 그 아래에 검은 볼펜으로 숫자 하나가 적혀 있었다. 403. 우리 건물은 4층까지 있고, 내 방은 302호였다. 옷 주인이 다른 층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에는 403호가 없다. 출근 준비를 하다가 결국 아래 편의점에 들렀다. 오전 6시 20분이면 아파트 단지 사이 도로에 학원차도 아직 없고, 편의점 문 앞에 택배 상자만 두세 개 놓여 있었다. 야간 근무하는 민재는 내 얼굴을 보자 컵라면 뚜껑을 덮으며 말을 붙였다. 나는 물 하나를 계산대에 올리고 세탁기 이야기를 꺼냈다. 403이라는 숫자를 들은 민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계산기 화면을 한 번, 내 뒤쪽 유리문을 한 번 봤다. 그러고는 작게, 그 호수는 전에 비슷한 말과 함께 나온 적이 있다고 했다. 작년 겨울 윗집 살던 사람이 세탁이 끝나면 자기 것이 아닌 옷이 한 벌씩 섞인다고 말했고, 이상한 건 옷보다 시간이었다고 했다. 항상 새벽에만 그랬다는 말이었다. 편의점 바깥은 이미 밝아지고 있었고, 자동문은 열릴 때마다 찬 공기를 얇게 밀어 넣었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다용도실에서 들었던 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물 빠지는 소리 다음에 분명히 있었는데, 그때는 세탁기 소리라고 넘긴 아주 짧은 소리. 누가 젖은 천을 두 번 털 때 나는 소리. 민재는 영수증을 내밀면서 내가 세탁기를 다시 돌려 놓고 나온 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 손등에 닿은 생수병 표면은 차가웠는데, 손끝에는 아직 미지근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분명 집을 나설 때 세탁기 전원은 꺼져 있었다. 그런데 휴대폰 화면 상단에, 내가 연결해 둔 적 없는 가전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세탁 종료까지 18분. 발신 기기는 표시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숙여 화면을 읽는 동안, 편의점 유리문 바깥으로 비닐에 싼 회색 후드집업을 든 사람이 한 번 지나갔다. 나는 얼굴을 못 봤고, 민재는 그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내가 못 들은 이름을 부른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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