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트 대기열

1챕터 · AI 시작

프린터는 내가 보내지 않은 문서를 먼저 뱉어냈다. 2027년 4월, 수요일 오전 7시 48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의 24시간 코인 빨래방 옆 공유오피스는 늘 그 시간에 비슷한 소리를 냈다. 빨래방 쪽에서 건조기 돌아가는 둔한 진동이 벽을 타고 넘어오고, 오피스 안에서는 천장형 에어컨이 잠깐씩 켜졌다 꺼졌다 했다. 나는 출근 전에 30분 정도 일찍 들러 제안서 수정본을 출력하는 습관이 있었다. 회사 프린터보다 종이가 덜 말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적어도 지난달까지는 그랬다. 내 이름은 윤서진이다. 33살,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를 쓴다. 2주 전부터는 이른 아침마다 같은 자리에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생겼다. 창가 바 테이블 맨 끝, 콘센트 2개가 붙은 자리. 그는 늘 노트북을 펴 두고 있었지만 타자를 치는 걸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 프린터 쪽을 자주 봤다. 처음엔 그냥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유오피스에선 남이 출력한 종이를 힐끗 보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먼저 쓴 프린터를 누가 건드리는지 신경 쓰는 사람도 있으니까. 오늘도 그는 회색 후드 집업에 검은 볼펜을 귀에 꽂은 채 앉아 있었다. 내가 카드키를 찍고 들어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가 웃는 척했다. "저를 아세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 컵 뚜껑을 한 번 눌러 보고 나서야 말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오시니까요. 7시 30분 전후. 수요일은 보통 더 빠르셨고."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맞는 말을 들을 때 사람은 오히려 반박할 데가 없어진다. 나는 모니터를 켜고 USB를 꽂았다. 파일 이름은 분명 "0416_최종_2"였는데, 프린터 아이콘을 누르기도 전에 복합기에서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처음엔 누가 원격으로 보냈나 싶었다. 공유오피스 앱에 연동된 프린터라 가끔 그랬다. 그런데 트레이 위로 나온 건 내 회사 서식도, 오늘 작업하던 제안서도 아니었다. A4 2장. 첫 장 상단엔 내 이름이 있었다. "윤서진". 그 아래엔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내가 지금 사는 백석동 오피스텔이 아니라, 3년 전까지 살던 인천 구월동 원룸 주소였다. 두 번째 줄에는 휴대전화 뒷번호 4자리. 그다음엔 내가 초등학교 때 다니던 피아노학원 이름까지 있었다. 너무 오래돼서 한동안 생각한 적도 없던 이름이었다. 종이 오른쪽 아래에는 인쇄 시각이 찍혀 있었다. "2027-04-16 07:46". 내가 이 공간에 들어오기 2분 전이었다. 나는 우선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예전 계정이 연동됐을 수도 있고, 누가 장난으로 검색해서 적당히 모은 개인정보를 출력했을 수도 있었다. 요즘은 이름 하나만 알아도 나오는 정보가 많다. 그런데 첫 장 맨 마지막 줄에서 손이 멈췄다. "왼쪽 어금니 금니 1개". 그건 온라인에 남아 있을 정보가 아니었다. 어제 밤 양치하다가 손톱으로 금니 가장자리를 건드렸을 때만 해도, 나는 그 사실을 나 말고는 치과 의사 정도만 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귀 뒤가 차갑게 식었다. 뒤에서 의자가 바닥을 미는 소리가 났다. 창가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 모양이었다. "저기요." 내가 먼저 불렀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평하게 나와서,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다. "이거 방금 누가 출력했는지 보셨어요?" 그는 프린터까지 오지 않고 중간쯤에 섰다. 거리를 재는 사람처럼. "못 봤어요. 근데 여기, 대기열 남지 않나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곧장 화면 오른쪽 아래 프린터 아이콘을 열었다. 방금 출력된 작업이 하나 떠 있었다. 문서명은 "sj_yoon_watch". 보낸 사람은 알파벳과 숫자가 섞인 긴 아이디였다. 그때 그가 다시 말했다. "이상하네요."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뭐가요?" "그 문서명. 아까 들어오시기 전에 누가 전화로 그 이름 부르는 것 같았거든요. 서진 씨라고." 내가 그에게 이름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쩌면 출입 앱 화면을 본 걸 수도 있었다. 명찰 없는 회사원 얼굴은 서로 금방 섞이고, 나는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없는 장면을 덧붙였을 수도 있다. 지난주에도 지하철 광고판 문구를 두 번 읽고 서로 다른 문장으로 기억했다. 피곤하면 사람은 자기 감각을 과신하다가도, 아주 사소한 데서 무너진다. 하지만 모니터 속 대기열은 내 착각이 아니었다. 문서 상세 정보가 자동으로 펼쳐져 있었고, 마지막 메모 칸에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8분 후, 세탁 완료 알림이 울리면 뒤를 보세요." 빨래방 쪽 건조기 진동은 그대로인데, 이상하게도 내 자리 뒤편에서 누군가 종이를 한 장 더 뽑아 드는 바스락거림이 들렸다. 그런데 프린터 상태 표시등은 초록색 고정이었다. 아무 작업도 진행 중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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