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잔 밑의 원

1챕터 · AI 시작

영수증은 같은 시간에 두 번 찍힐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그랬다. 2027년 7월 오전, 수원 행궁동의 골목 카페는 8시 30분쯤부터 손님이 몰렸다. 출근 전에 테이크아웃을 해 가는 사람들, 근처 공방 문을 열기 전에 들르는 사람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는 사람들. 나는 바 테이블 끝자리에서 주문을 받고 컵 뚜껑을 닫는 일을 9개월째 하고 있었다. 이름은 이서윤, 스물아홉. 에어컨이 약해서 얼음통 옆에 오래 서 있으면 팔 안쪽만 차가워졌다. 그날도 바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건 손님이 아니라 프린터에서 먼저 나왔다. 오전 8시 17분. 아메리카노 1잔, 연하게, 개인 텀블러. 그리고 3초 뒤, 똑같은 영수증이 한 장 더 밀려 나왔다. 같은 주문번호였다. 나는 종이를 두 장 포개 들고 포스기를 다시 봤다. 결제 내역은 1건뿐이었다. 기계 오류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컵 선반 아래에 이미 텀블러가 놓여 있었다. 짙은 회색, 흠집이 많은 스테인리스 텀블러. 뚜껑 손잡이에 파란 실리콘 고리가 달려 있어서 기억하기 쉬웠다. 나는 그걸 본 적이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늘 같은 시간대는 아니었지만, 계산대에 올려놓고 말없이 카드만 내미는 여자 손님이 썼다. 마흔쯤으로 보였고, 머리를 낮게 묶었다. 특이한 건 주문할 때마다 내 이름표를 한 번 읽고 간다는 점이었다. 서윤. 입 밖으로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읽는 눈이었다. 나는 주방 쪽에서 우유팩을 정리하던 한민재를 불렀다. 영수증을 받아 든 그는 나보다 두 살 어렸고, 이상한 일을 보면 일단 웃고 보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프린터를 한 번, 텀블러를 한 번 봤다. 손님이 두 번 눌렀다가 취소한 것 아니냐고 했고, 나는 취소면 취소표가 떠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어제 것이 걸렸다가 지금 나온 거냐는 말에는 시간까지 오늘이라고 답했다. 민재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바쁜 시간에는 설명이 긴 일이 제일 먼저 밀린다. 나도 그걸 알아서 더 붙잡지 않았다. 대신 텀블러를 손끝으로 조금 돌려 바닥을 봤다. 컵 밑면에 투명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거기에 검은 펜으로 숫자 두 개가 적혀 있었다. 4, 7. 의미를 정하기엔 너무 짧은 숫자였다. 그때 출입문 위 풍경종이 울렸고, 그 여자가 들어왔다. 낮은 굽 샌들 소리가 타일 바닥을 짧게 찍었다. 나는 자동으로 어서 오시라고 말했지만, 시선은 손보다 먼저 그 사람 얼굴로 갔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알아볼 수 있었다. 걸음이 급하지 않은데 곧장 내 앞으로 온다는 점, 그리고 메뉴판은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자는 텀블러를 보지 않고 내 얼굴만 봤다. 제 것이 나왔느냐고 묻는 말이 자연스러우려면, 방금 주문했거나 미리 주문한 사실을 내가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앱 주문 알림은 없었다. 나는 포스기 화면을 다시 켰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주문 성함을 물었을 때도 여자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대 모서리에 놓인 사각 설탕 통을 손가락으로 한 번 밀었다. 2cm쯤 움직였다가 멈췄다.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그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름은 지난주에도 물으셨잖아요,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지난주는 내가 수, 목, 금 오전 근무를 했던 주였다. 그중 목요일엔 몸살 때문에 빠졌다. 나는 그 사실을 또렷이 기억했다. 약 봉투를 들고 동네 의원에서 나왔고, 오후 2시 10분쯤 민재에게 대타 부탁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여자의 말을 듣는 순간, 목요일 오전 바 테이블에 서서 이 여자에게 컵을 건네는 내 모습이 잠깐 선명하게 떠올랐다.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거짓말 같았다. 사람 기억은 원래 이런 식으로 틈을 메우는 걸까. 아니면 내가 아픈 날조차 가게에 나왔던가. 나는 그날 먹은 약 이름까지 기억하는데, 정작 내 몸이 어디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안쪽에서 민재가 연한 아메리카노 맞느냐고 말했다. 나는 여자를 보고 있었고, 여자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민재는 주문표를 본 적도 없는데 메뉴를 정확히 말했다. 내 손 옆에는 같은 번호의 영수증 두 장이 겹쳐 있었고, 텀블러 밑에 맺힌 물이 나무 상판에 동그란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그 원은 하나였는데, 여자는 오늘은 두 잔이 아니냐고 낮게 물었다. 10분 후면 사장 조은비가 출근한다. 나는 그때까지 이 여자가 정말 며칠째 같은 말을 반복하는 단골인지, 아니면 오늘 처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인지 정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동안, 계산대 안쪽 내 개인 수첩 맨 위 페이지에는 오늘 적은 적 없는 글씨로 8:17, 회색 텀블러, 먼저 왔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0

이 노드 뒤를 이어 쓸 수 있습니다 (3,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