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시계의 뒷면
1챕터 · AI 시작
춘천 명동 지하상가 관리실의 벽시계는 매주 수요일마다 1분 늦었고, 그 1분은 늘 시계의 앞면이 아니라 뒷면에서 시작됐다.
2029년 3월, 오후 4시 10분. 관리실 안은 전기포트 끓는 소리와 복사기 팬 돌아가는 소리로 적당히 차 있었다. 한서진은 분실물 대장을 무릎 위에 펴놓고 볼펜 끝으로 줄을 맞추고 있었다. 투명 우산 2개, 어린이 운동화 한 짝, 손잡이 닳은 장바구니 1개. 오전에 들어온 물건들이었다. 지하상가에서는 이상하게도 짝이 잘 갈라졌다. 신발은 한 짝씩 오고, 장갑도 한 손씩 들어왔고, 가끔은 영수증만 접힌 채 발견됐다. 서진은 그런 걸 오래 보았기 때문에, 세상에 원래 한 쌍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꼭 같이 남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특별한 건 벽시계였다. 둥근 플라스틱 테두리, 광고 문구도 없는 흰 바탕, 검은 분침. 평범해서 교체 요청이 한 번도 없던 물건. 그런데 수요일만 되면 시곗바늘이 4시 17분에서 4시 16분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먼저 뒤쪽에서 얇은 긁히는 소리가 났다. 벽에 밀착된 뒷면에서, 누가 손톱으로 플라스틱을 안쪽에서 한 번 긁는 것 같은 소리. 처음 들었을 때 서진은 건전지가 헐거운 줄 알았다. 두 번째에는 벽 속 배선 문제겠거니 했다. 세 번째부터는 매주 수요일 4시 16분 40초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관리실에 혼자 있든, 옆에 경비 반장 박문태가 컵라면 물을 붓고 있든, 소리는 빠지지 않았다.
"또 보네."
문태가 말했다. 종이컵 뚜껑을 반쯤 덮은 채였다.
"예. 오늘도 1분 밀릴 것 같아서요."
"밀리는 게 아니라 빠지는 거지."
문태는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 꼭 아는 게 더 있다는 사람처럼 말하고, 정작 설명은 덜 했다. 서진은 대답 대신 대장 한 귀퉁이에 시간을 적었다. 4시 16분. 그때 벽시계에서 예상한 대로 소리가 났다. 사각, 하고 짧게. 복사기 팬은 계속 돌고 있었고, 전기포트는 이미 전원이 내려가 있었다. 관리실은 방금 전과 똑같았는데, 시계만 1분 전으로 미끄러졌다.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내렸다. 문태가 말리지는 않았다. 건전지 뚜껑은 잘 닫혀 있었고, 먼지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뒷면 중앙, 벽에 가려 평소엔 보이지 않는 부분에 연필로 쓴 글자가 있었다. 동그랗고 힘없는 필체였다. 4시 17분에 돌려놓지 말 것.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고 이름도 없었다. 관리실 비품에 누가 낙서를 해두었는지부터 따지는 게 맞았지만, 서진은 먼저 글씨 아래를 봤다. 플라스틱 틈 사이로 아주 얇은 종이 끝이 비쳐 있었다. 광고지 한 귀퉁이처럼 누런 색이었다. 문태는 컵라면을 내려다본 채 젓가락만 움직였다. 그제야 눈을 들었을 때도,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서진은 벽시계를 손에 든 채 가만히 섰다. 관리실 벽에는 못 자국이 하나뿐이었고, 못 주변은 다른 부분보다 덜 바랬다. 오래 걸려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저 시계를 달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달력을 넘겨보면 작년 3월도, 재작년 3월도 수요일은 있었고 자신도 분명 여기 출근했다. 다만 시계를 손에 들었던 기억만 비어 있었다. 더 이상한 건, 시계를 내린 뒤에도 벽 쪽에서 초침 가는 소리가 계속 났다는 점이었다. 서진의 손 안에 있는 시계는 멈춰 있었는데, 벽은 1초씩 정확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하상가 방송 점검까지는 12분 남아 있었다. 오후 4시 30분이 되면 전체 스피커가 켜지고, 관리실에서 오늘 날짜와 폐점 안내 예행방송을 내보내야 했다. 그 전까지 서진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시계 뒷면 틈에 낀 종이를 꺼내 읽을지, 아니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벽에 걸어둘지. 문태는 라면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이 시계를 뒤집어 들고 있는 동안, 빈 벽의 못 아래로는 방금 생긴 것처럼 가는 연필가루가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