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밤의 복숭아

1챕터 · AI 시작

복숭아 상자 하나가 바닥에 먼저 터졌다. 얇은 종이망에 싸여 있던 과육이 옆으로 밀리면서, 덜 익은 향과 상한 단내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나는 무릎을 굽힌 채 멈춰 있었다. 주워 담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발밑에 번진 연분홍 물기를 보고 있자니 손이 늦었다. 적재장 창고는 밤 10시가 넘어도 공기가 식지 않았다. 2029년 8월, 대전 산성동 농산물 도매시장의 하루가 그제야 끝나가고 있었다. 하루 끝의 소리만 남아 있었고, 플라스틱 박스가 끌리는 소리와 지게차 후진 경고음이 멀리서 끊겼다 이어졌다. 나는 폐점 정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3주째였고, 오늘도 장갑 안쪽 손바닥이 복숭아 털에 간질거렸다. "그렇게 보면 더 망가져요." 뒤에서 말한 사람은 여름 점퍼 지퍼를 턱밑까지 올리고 있었다. 시장 안에서 얼음 납품을 도는 사람, 윤태경. 이름은 며칠 전에야 알았다. 다른 가게 사람들은 그를 "태경 씨"라고 불렀고, 나는 그 부름을 두 번쯤 듣고 나서야 속으로 따라 불러봤다. 그는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멀쩡한 것부터 골라 상자에 세웠다. 얼음 상자를 들던 손이라 그런지 손등이 희게 식어 있었다. 내가 급히 집은 복숭아 하나는 바닥에 부딪힌 자국이 깊었는데, 그는 그것만 내 손에서 빼서 따로 놓았다. 그는 바닥에 번진 과즙을 걸레로 훑으며 내 쪽을 보지 않은 채 물었다. "퇴근하고 바로 가요?" "네." 대답은 금방 했는데, 너무 빨라서 오히려 변명 같았다. 사실 바로 가진 않았다. 시장 뒤 공터 벤치에 20분쯤 앉아 있다가 첫차 끊긴 버스 노선표를 보고, 결국 언니 집으로 갈지 원룸으로 돌아갈지 매번 계산했다. 원룸에는 6월 말에 끝난 결혼사진 촬영 계약서가 아직 식탁 위에 있었다. 찢지는 못했고, 접어 넣지도 못했다. 그런 걸 남에게 말할 이유는 없는데도, 태경 앞에서는 내가 말을 삼킨 자리가 자꾸 목에 걸렸다. 정리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주인아주머니인 안복례 씨가 적재장 문을 반쯤 닫으며 말했다. "수임아, 너 오늘도 남아서 선별표 적을 거면 형광펜 내 서랍에 있다." 나는 금방 하고 가겠다고 대답했다. 태경은 빈 아이스박스를 포개다가 멈칫했다. 그때 복례 씨가 웃지도 않은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태경 씨도 기다리는 거 아니었냐고, 아까부터 냉동차 시동도 안 켜고 있던데 하고. 나는 선별표 종이를 집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기다린다는 말이 누구에게나 가볍게 붙을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그 말은 내 쪽 피부에 먼저 닿았다. 태경은 아니라고 짧게 말했지만 부정하는 목소리가 성기게 들렸다. 복례 씨는 이미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적재장에는 조명이 한 줄만 남았다. 그 아래서 태경의 팔뚝에 닿았던 얼음물 자국이 천천히 마르고 있었다. 나는 선별표 맨 위 날짜를 적다가, 오늘이 8월 19일이라는 걸 두 번 확인했다. 다음 주 수요일이면 원룸 계약을 연장할지 말지 답을 줘야 했다. 언니는 대전역 근처 오피스텔로 들어오라고 했고, 어머니는 다시는 약속 미루는 사람과 엮이지 말라고 말했다. 태경은 내 옆 철제 테이블에 기대 서서 휴대전화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누구든 기다리면서 화면을 켜지 않을 수 있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름도 제대로 불러본 적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물을 수 있는지 가늠했다. 복숭아 상자 밑면에서 젖은 종이가 조금씩 들러붙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적재장 문은 닫혀 있는데도 바깥에서 냉기가 들어오는 것처럼 발목이 서늘했다. "수임 씨." 태경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낮게 부른 한 번뿐인데, 나는 선별표에 적던 숫자 19의 꼬리를 괜히 길게 빼고 말았다. 그가 다음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언니에게 전화해 오늘 당장 짐을 옮긴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상한 복숭아 여섯 개를 봉지에 담아 들고, 왜 시동을 안 켰는지부터 물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의 적재장 냄새는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내가 아직 고개를 들지 않은 동안, 태경의 냉동차 앞유리 안쪽에는 시동도 켜지지 않았는데 성에처럼 하얗게 김이 얇게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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