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이 제일 비싸다
1챕터 · AI 시작
밤 10시가 넘은 서귀포 농수산물 경매장, 감귤 상자 줄 맨 끝에 귤 대신 유리병이 든 상자들이 있었다. 병마다 검은 모래가 반쯤 차 있었다.
삼촌 소개로 하룻밤 일하러 온 지훈에게, 작업복 입은 아주머니가 종이표 한 묶음을 건넸다.
"병을 귀에 대 봐요. 들리는 소리를 한 단어로 적어서 병목에 묶고."
"아무것도 안 들리면요?"
"빈칸으로 둬요. 빈칸이 제일 비싸요."
첫 병에서는 물이 밀려왔다 빠지는 소리가 났다. 흔들어도 모래는 바닥에 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는데, 소리만 났다. 지훈은 '파도'라고 적었다. 옆에서 귤망을 접던 청년이 힐끗 보고 웃었다.
"파도는 흔해요."
경매가 시작되자 정말 그랬다. 파도나 바람이 묶인 병은 금방 팔렸고, 빈칸이 묶인 병은 끝까지 남았다가 가장 높은 값에 나갔다. 낙찰받은 사람들은 귀에 대 보지도 않고 병을 품에 안고 나갔다.
마지막 상자에는 병이 하나뿐이었다. 아주머니가 그걸 지훈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총각이 들어 봐요."
귀에 대자 처음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빈칸이구나 싶어 펜을 집는 순간, 아주 작게 숨소리가 들렸다. 지훈이 숨을 멈추자 병 속의 숨소리도 멈췄다.
지훈은 종이표를 내려다봤다. 아직 펜을 대지 않았는데, 빈칸 한가운데에 펜 끝으로 꾹 누른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