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망 접는 사람들
1챕터 · AI 시작
밤 10시가 넘으면 제주 서귀포 농수산물 경매장은 낮보다 조용해진다. 낮 경매가 끝난 자리에 파렛트를 새로 깔고, 상자를 줄 맞춰 내리고, 지게차가 후진 경고음을 짧게 울리며 통로를 비운다. 강지훈은 입구에서 배낭 끈을 고쳐 잡은 채 그 줄을 눈으로 따라갔다. 오늘 처음 온 데였다. 삼촌이 사람 손이 모자란다고 급하게 불러냈는데,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부터 알 수 없었다. 바닥은 젖어 있었고, 감귤 냄새 사이로 젖은 밧줄 냄새가 섞여 났다.
상자는 대부분 감귤이었다. 다만 통로 맨 끝 줄에 놓인 상자 열댓 개에는 뚜껑이 없었고, 그 안에 감귤 대신 손바닥만 한 유리병이 스무 개씩 눕혀져 있었다. 병에는 검은 모래가 절반쯤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병을 하나씩 집어 귀에 대 보고, 내려놓고, 접은 종이표를 병목에 고무밴드로 묶었다. 서두르지도 않고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귤망 접는 것과 같은 손놀림이었다.
출입구 옆 접는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먼저 지훈을 불렀다. 목소리는 낮았는데 잘 들렸다. 작업복 이름표에 박순애라고 적혀 있었다.
"누구 찾아요?"
"한성태 씨요. 제 삼촌인데요. 오늘 오라 해서."
"성태 씨 조카면 늦진 않았네. 거기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순애는 얇고 까슬한 종이표 한 묶음을 건넸다.
"병 나오면 귀에 대 보고, 들린 소리를 여기 적어서 병목에 묶어요. 한 단어만."
"무슨 소리를요?"
"병에서 나는 소리요. 안 들리면 빈칸으로 둬요. 빈칸이 제일 비싸게 나가니까."
지훈은 상자에서 병 하나를 집었다. 유리는 차가웠고 생각보다 무거웠다. 귀에 대자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물이 얕게 밀려왔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병을 흔들어 봐도 안의 모래는 아래에 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만 났다. 지훈은 종이표에 '파도'라고 적어 병목에 묶었다.
옆에서 망을 접던 청년이 힐끗 봤다.
"처음이죠?"
"네."
"파도는 흔해요. 그건 값 안 나가요."
11시가 되자 경매사가 단상에 올라갔다. 전광판에 상자 번호가 뜨고, 중도매인들이 응찰기를 눌렀다. 감귤 상자는 한 줄에 몇 초씩 걸렸다. 병이 든 상자 차례가 되자 속도가 느려졌다. 사람들이 병목의 종이표를 하나씩 들춰 보고 나서야 숫자가 올라갔다. '파도'라고 적힌 병들이 먼저 빠졌고, 빈칸이 묶인 병은 마지막까지 남아 가장 높은 값에 나갔다.
지훈이 그걸 보고 있는데, 경매장 끝 냉장창고 문이 열렸다. 한성태가 두 사람과 함께 낮은 수레를 밀고 나왔다. 수레 위에는 상자가 하나뿐이었고, 그 안에는 병도 하나뿐이었다. 다른 병들보다 두 배쯤 컸다. 성태는 지훈을 보자 손을 한 번 들었지만 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수레가 통로에 서자 사람들이 접던 망을 내려놓았다. 아무도 그 상자 쪽으로 가지 않았다.
청년이 지훈의 팔꿈치를 툭 쳤다.
"저건 조카가 걸어야 돼요."
"왜요?"
"가족이 들으면 소리가 잘 잡히거든요."
지훈은 상자 앞으로 갔다. 병은 두 손으로 들어야 했다. 귀에 대자 아까 그 물소리가 먼저 났고, 조금 뒤에 소리가 하나 더 겹쳤다.
"지훈아, 배낭은 두고 와라."
두 시간 전 전화로 들은 목소리 그대로였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통로 끝을 봤다. 한성태는 수레 손잡이를 잡은 채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지훈이 종이표에 첫 획을 긋는 순간, 성태가 사람들 사이를 밀치며 뛰어와 그의 손에서 병을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