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고르는 화분
1챕터 · AI 시작
화분이 사람보다 먼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2046년 7월, 오후 5시 40분. 세종시 금강 남쪽의 공중농원 3동은 퇴근 직전마다 조금씩 느려졌다. 천장 유리 위로 지나가는 구름이 빛을 가리면, 재배대 12줄에 매달린 잎채소들이 동시에 잎의 각도를 바꿨다. 자동이라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 움직임을 볼 때마다 누가 잠깐 어깨를 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이름은 윤해민이고, 나는 여기서 식물의 호흡 기록을 읽는 일을 한다. 정확히는, 뿌리 근처 미생물 센서가 보내오는 수치를 보고 물과 영양액, 그리고 대화 시간을 조절한다. 대화 시간은 농원 규정집 어디에도 없지만, 3년째 일하면서 내가 제일 신경 쓰는 항목이었다.
재배대 맨 끝, 7-B 칸에는 오늘 새로 들어온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외형은 평범했다. 지름 28cm짜리 회색 세라믹 포트, 배양토 대신 투명 젤층, 줄기는 손가락 두 마디 굵기. 다만 잎이 없었다. 대신 줄기 표면에 반투명한 막이 얇게 올라와 있었고, 그 막 아래로 느린 파동이 지나갔다. 숨을 쉰다면 저렇게 쉴 것 같았다. 배송 태그에는 품종명이 아니라 임시 표기만 적혀 있었다. 회복 개체 M-31. 발신지는 대전 합성생육센터. 나는 태그를 두 번 읽었다. 회복 개체라는 말은 보통 병충해나 냉해를 견딘 식물에 붙는다. 그런데 이 화분은 상처가 없었다.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갓 병원에서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관리실 쪽에서 서린이 손을 흔들었다. 서린은 오늘 야간 교대자였고, 나보다 8살 어렸다. "그거 해민 씨 담당으로 떨어졌어요?" "응. 기록 파일은 비어 있더라."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잠겨 있는 거래요. 아까 본사에서 연락 왔어요. 6시 전에 적응 여부만 확인해 달라고."
나는 화분 옆 단자에 판독기를 연결했다. 보통은 수분 포화도, 광합성 효율, 뿌리 전도율 순으로 숫자가 뜬다. 그런데 M-31은 먼저 음성 파형을 띄웠다. 짧고 긴 진동이 규칙 없이 이어졌다가, 내 손이 포트 가장자리에 닿자 갑자기 잦아들었다. 센서 오류라고 생각하고 다시 손을 뗐다. 그러자 파형이 커졌다. 서린이 내 옆으로 와서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거, 반응하네요." "온도 때문인가?" "아뇨. 사람 구분하는 모델이래요. 요즘 요양시설에 들어가는 보조식물 있잖아요. 맥박하고 목소리 익혀서 불안 낮춰 주는 거. 그쪽 파생형일 수도 있대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지난봄에 아버지가 그런 식물을 한 달쯤 써 봤기 때문이다. 불면이 심해져서, 밤마다 방 안 산소 농도가 아니라 마음의 농도를 맞춰 준다는 광고를 믿고 들여놓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식물한테는 끝내 익숙해지지 못했고, 대신 내 목소리를 샘플로 넣어 달라고 했다. 멀리 살아 자주 가지 못하는 딸이나 아들 목소리를 대신 틀어 주는 서비스가 당시엔 흔했다. 나는 17문장을 녹음했다. 물 드세요, 창문은 닫으세요, 오늘은 덜 더워요 같은 말들. 그 뒤로 아버지는 4개월 더 살았다. 그 시간이 식물 덕분이었는지, 그냥 원래 남아 있던 시간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M-31의 파형은 내가 생각에 잠길수록 또렷해졌다. 화면 아래쪽에 작은 문장이 떴다. 초기 동조율 68%. 권장 음성 입력 진행. 나는 안내 문구를 한참 보다가 판독기 마이크를 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농원에서는 보통 식물에게 현재 상태를 읽어 준다. 조도 안정적입니다 같은 말. 그런데 그 문장을 입에 올리려니 이상하게도 병실 냄새가 먼저 떠올랐다. 젤층에서 올라오는 약한 미네랄 향, 유리 천장에 맺힌 수분, 퇴근 방송 10분 전 알림음이 겹쳐서 잠깐 어지러웠다.
"안녕하세요," 나는 결국 그렇게 말했다. "오늘 여기 처음 왔죠." 파형이 한 번 크게 튀었다가 안정됐다. 그리고 잠금 상태여야 할 기록 창이 스스로 열렸다. 재배 이력 대신 음성 목록이 보였다. 파일은 1개뿐이었다. 제목은 등록자 미상, 재생 시간 14초. 나는 화면을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깜빡였다. 목록 옆 작은 안내창에는 7분 후 본사 원격 회수 드론 도착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아직 파일을 재생할지, 그대로 잠금 복구 요청을 넣을지 정하지 못했다. 그 짧은 사이에도 M-31의 줄기 아래 막은 내 쪽으로 미세하게 수축했고, 유리 천장 위로는 저녁 자동 차광막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농원 안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판독기 스피커에서는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