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색 펜 자국

1챕터 · AI 시작

원고지보다 먼저 사람의 숨이 밀려오는 시간이 있었다. 대구 2월 저녁 6시 20분, 수성구의 작은 인쇄소 2층 교정실은 히터를 세게 틀어도 종이 끝이 늘 차가웠다. 나는 접수된 원고 묶음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잠깐 열을 옮기는 버릇이 있었다. 종이는 금방 식었고, 손은 잉크 냄새를 오래 붙들었다. 그날도 마감 40분 전이었다. 제본실에서 올라온 박스 하나가 책상 옆에 놓였고, 박스 테이프 사이로 체리색 볼펜이 1자처럼 꽂혀 있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빨간 펜은 썼지만, 저런 묽은 체리색은 고르지 않았다. 내가 펜을 집어 들었을 때 옆자리의 정미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까 5시쯤 새로 온 편집자 한 사람이 3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여기서 교정을 봤다고 했다. 이름은 윤서였나, 하고 정미는 끝을 흐렸다. 정미는 늘 사람 이름을 대강 기억했다. 나는 펜을 다시 내려놓았다. 손에 닿는 부분이 미지근했다. 방금까지 누가 쥐고 있던 물건처럼. 교정실 문은 닫혀 있었고,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만 일정하게 들렸는데, 이상하게도 그 펜 하나 때문에 방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던 사람의 어깨 높이와 손목 각도 같은 게 또렷해졌다. 그런 상상은 대개 금방 지워졌지만, 지워지지 않는 날이 있었다. 박스 안 원고는 아동문고 시리즈 4권 시안이었다. 교정 기호가 촘촘하게 들어가 있었고, 내가 쓰지 않는 표시가 몇 개 섞여 있었다. 빼기표 옆에 작은 동그라미, 문장 사이를 너무 세게 끊지 않으려는 사람의 습관 같은 것. 28쪽 하단에는 체리색으로 짧게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이 문장, 너무 착해서 슬픔이 늦게 옴. 문장에 대한 말인데도 사람 얘기처럼 읽혔다. 나는 그 줄 아래를 손가락으로 한 번 문질렀다. 잉크는 이미 말라 있었고, 종이만 약간 거칠었다. 누군가의 생각이 말라붙으면 이런 촉감일까, 하는 식의 쓸데없는 생각까지 했다. 7시 가까워져서 정미가 컵라면 뚜껑을 반쯤 연 채 나를 봤다. 오늘 송장 마감이 일찍 끊긴다며 안 내려가냐고 물었지만, 나는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만 조금 들었다. 그때 교정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린 채였다가, 안이 더운 걸 느꼈는지 한 손으로 천천히 내렸다. 목 근처에 닿아 있던 찬 공기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에 아주 약한 비누 냄새가 났다. 달거나 깨끗한 척하는 향이 아니라, 손을 여러 번 씻고 난 뒤에만 남는 밋밋한 냄새였다. 그는 문 앞에서 잠깐 멈추더니 내 책상 쪽을 봤다. 시선이 펜에서, 원고 28쪽에서, 다시 내 얼굴로 올라왔다. 윤서인지 윤호인지, 정미가 흘린 이름의 음절들이 잠깐 뒤섞였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펜을 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펜을 찾는다는 뜻을 꺼내자 나는 곧장 내밀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집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더했고, 나는 왜 늦었는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펜을 건넸다. 그의 손끝이 내 손가락 옆면을 스칠 만큼 가까웠다가, 실제로는 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닿았다고 생각한 건 내 손 쪽이었다. 그는 펜을 받아 들고 원고 한 장을 같이 집어 들었다. 28쪽이었다. 체리색 메모가 있는 페이지. 그가 그 줄을 보고 잠깐 웃는 것 같더니, 곧 표정을 접었다. 메모는 습관이라며 지워도 된다고 했고, 나는 이해되니까 안 지워도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정미가 컵라면을 들고 나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서윤은 원래 남이 쓴 메모를 제일 싫어하지 않냐고 툭 던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의 이름을 아직 제대로 못 들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속으로는 이미 몇 번 불러본 사람처럼, 입천장 가까이에 어떤 음절을 올려두고 있었다. 남자는 펜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나도 원고를 넘기지 못했다. 창밖은 아직 환한데 교정실 유리에는 이미 실내 불빛이 먼저 비쳤고, 복사기 소리는 멀어지는데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가까운 것처럼 들렸다. 7분 후면 1층 택배 기사님이 마지막 송장을 가져갔다. 나는 이 사람에게 28쪽의 메모 이야기를 더 물을지, 아무 말 없이 송장 박스를 들고 내려갈지 고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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