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구창 스티커
1챕터 · AI 시작
나는 같은 구간을 세 번째 지나고 있다.
저녁 7시가 넘은 대전 순환버스 안은 퇴근 냄새보다 세탁 비누 냄새가 더 난다. 좌석 머리받침마다 붙은 복구창 스티커가 승객이 내린 자리의 풍경을 몇 초씩 붙들어 두는 탓이다.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사람의 어깨선, 손에 들린 장바구니 모양, 창에 기대 졸던 이마 자국 같은 것들이 얇은 막처럼 남아 있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처음 깔렸을 때는 멀미 난다고 민원이 많았다지만, 요즘은 다들 없는 것처럼 지낸다. 나도 그렇다. 다만 오늘은 맨 뒷바퀴 위 좌석에 앉아, 사라져야 할 것들이 유난히 오래 남는 쪽만 자꾸 보게 된다.
대전 서구에 있는 기후기록보관소에서 필름을 닦는 일을 한다. 필름이라고 하면 다들 오래된 취미쯤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공기 성분이 바뀌기 전 하늘 색을 저장한 얇은 판들이다. 손가락 기름이 한 번 묻으면 복원값이 틀어져서, 하루 종일 장갑을 끼고 있다가 퇴근하면 손등이 먼저 붉어진다. 오늘도 마지막 점검 때 보관함 하나가 비어 있는 걸 보고, 누구 실수인지 적는 대신 문을 다시 닫았다. 그런 날엔 곧장 집에 가야 하는데, 나는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탄다. 버스가 오래 흔들릴수록 생각이 한 군데 붙지 않아서 좋다.
천장 스피커에서 안내음이 한 번 울리고, 버스 운영음성이 낮게 말한다.
"다음 정류장은 정부청사역입니다. 하차 전 창면 잔류상을 확인해 주십시오."
창면 잔류상. 공문에는 그렇게 쓰고, 기사들은 그냥 잔상이라고 부른다. 뒷문 쪽 접힌 좌석 유리에는 조금 전 내 옆을 스쳐 간 학생 가방 끈이 아직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맨 앞문 가까운 큰 창에는, 오늘 이 버스에서 내린 적 없는 사람이 붙어 있다. 회색 셔츠에 소매를 두 번 걷은 팔, 팔꿈치 안쪽에 반달 모양 흉터. 얼굴은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왼손 엄지에 투명 테이프를 감는 버릇까지 그대로다. 보관소에서 같이 일하던 윤호가 늘 그랬다. 종이를 빨리 넘기려다 손끝이 갈라지면, 밴드 말고 테이프를 대충 감는다.
나는 자리에서 조금 몸을 세운다. 버스는 정류장에 붙지 않고 신호를 기다리며 미끄러지듯 선다. 앞문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빈 공간 위로만 회색 셔츠의 팔이 남아 있다. 잔상은 대개 방금 내린 사람에게서 생긴다. 길어야 몇 초, 오래 남아도 다음 정류장 전에는 흐려진다. 그런데 저건 점점 선명해진다. 윤호는 4개월 전에 퇴사했다. 퇴사라고들 했지만, 마지막 날 사물함은 비어 있었고 출입기록은 점심 이후로 끊겼다. 나는 그날 그의 책상 서랍에 남은 손톱깎이와 말라붙은 풀을 정리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내 폰이 무릎 위에서 한 번 떨린다. 발신 이름은 없고, 보관소 내부 회선에서만 쓰는 짧은 번호다. 나는 받지 않은 채 화면만 켠다. 문자 1개.
"세린 씨, 오늘 비운 칸 확인했어요?"
보낸 사람 표시도 없다. 내부 회선은 퇴근 후엔 자동으로 닫힌다. 기사석 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고, 곧 낯익은 목소리가 객실 마이크를 타고 흐른다.
"뒤에 계신 분, 멀미 나면 복구창 끄셔도 돼요. 오늘은 세게 남네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앞유리를 계속 본다. 텅 빈 통로 바닥에 정류장 불빛이 들락거리고, 그 위에 겹친 윤호의 팔이 천천히 들린다. 그 아래 붙은 노선 스티커 모서리가 혼자 들뜨더니, 오래된 테이프를 떼어낼 때처럼 조금씩 말려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