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잎의 순서
1챕터 · AI 시작
잎은 사람보다 먼저 길을 기억했다.
2043년 5월, 안동 풍천면의 종묘 온실은 오전 7시만 되어도 유리 지붕 아래가 환해졌다. 나는 출근 카드를 찍지 않는다. 대신 입구 작업대 위에 놓인 얇은 판에 손등을 3초 올린다. 체온과 땀 성분으로 오늘 내 몸 상태를 읽고, 어떤 구역에 들어가도 되는지 결정하는 장치였다. 종자 보존동에서 일한 지 6년째인데도, 판이 초록빛을 내며 통과를 허락할 때마다 이상하게 허리를 한 번 펴게 된다. 오늘 내가 맡은 건 대리 잎 순서 점검이었다. 멸종 직전 야생종에서 떼어 온 잎맥 배열을 그대로 보존한 나무들인데, 이 나무들은 사람이 보기엔 비슷해도 자라는 방향이 매일 조금씩 달랐다.
내 이름은 문희재다. 나는 가위보다 핀셋을 오래 쥐는 사람이고, 누가 묻지 않아도 식물 이름 앞에 원산지를 붙여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작업대 위에 놓인 도시락 통에는 새벽에 삶아 온 감자가 2개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아직도 흙 만지는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내 손에 묻는 건 흙보다 젤과 분무액이 더 많다. 온실 4구역 끝줄, 17번 베드에 선 대리 개체는 지난달부터 이상한 방식으로 잎을 냈다. 보통은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 순으로 번갈아 나와야 하는데 이 나무는 2주째 같은 방향으로만 새잎을 밀어 올렸다. 병이라고 보기엔 색이 좋았고, 스트레스 반응이라고 보기엔 성장 속도가 너무 일정했다.
나는 기록 태그를 눌러 홀로그램 격자를 띄웠다. 잎의 각도, 길이, 수분 포화도를 자동으로 적어 넣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최종 판정은 사람 손으로 한다. 화면 숫자 옆에 작은 음성 표시가 깜빡였다. 야간 관리 담당인 서보윤이 남긴 메모였다. “17번 또 밤새 움직였어요. 이번엔 11cm.” 나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새벽 2시 14분부터 2시 27분까지, 고정 촬영 영상 속 나무는 정말로 움직였다. 바람도 없고 온실 순환팬도 멈춘 시간이었는데 잎 하나가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햇빛을 따라가는 움직임과는 달랐다. 더듬는 것처럼, 정확히 통로 쪽으로.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보윤이 물병을 들고 들어왔다. “봤죠? 제가 센 거 맞죠?” 보윤은 웃지 않고 말했다. 그 표정을 보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는 올해 스물아홉이고, 잎 끝 상처를 사람 피부 찢긴 것처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대리 잎이 사람 움직임을 따라 배열을 바꾸는 현상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2030년대 후반부터 복원종 일부에 미세 자기감응 구조를 넣는 일이 흔해졌으니까. 종자 은행들은 이주 경로를 잃은 식물들에게 방향 감각을 돌려주려 했다. 다만 우리 온실 4구역에는 그런 개조 개체가 들어올 수 없었다. 여긴 복원 이전의 원형 데이터를 보존하는 곳이었고, 출처가 섞이면 40년치 기록이 망가진다. 나는 그 규정을 외울 정도로 들었다. 그래서 영상보다 더 신경 쓰인 건, 어제 저녁 내가 마지막으로 17번 베드를 정리할 때 보았던 작은 흠집이었다. 줄기 표면에 규칙적인 사각 무늬가 3칸, 손톱으로 눌린 것도 벌레 자국도 아닌 모양. 우리 온실에서 그런 자국을 남기는 건 라벨 프린터 헤드 아니면 이식용 접합 클램프뿐인데, 둘 다 4구역에는 없는 장비였다.
나는 오전 점검표를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4구역 출입 예약 목록 맨 아래에 오늘 9시 30분 방문자가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외부 감사도, 연구원도 아닌 개인 면담. 신청인 이름은 윤이삭. 방문 사유는 짧았다. “기증 개체 확인 요청.” 나는 그 이름을 3번 읽고서야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렸다. 6년 전, 내가 입사 교육을 받던 날 폐기된 옛 파일 묶음에서 본 이름이었다. 정식 반입되지 못한 종자 꾸러미의 기증 예정자. 기록상으로는 도착하지 않은 사람. 보윤이 내 옆에서 점검판을 보다가 낮게 말했다. “희재 선배, 저 이름, 왜 17번 베드 임시 라벨 뒤쪽에 적혀 있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6년 동안 한 번도 17번 라벨의 뒷면을 확인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온실 스피커에서 방문 20분 전 안내음이 울렸다. 유리 지붕 너머로 햇빛은 점점 강해지는데, 내 코끝에는 방금 분사한 소독액 냄새만 나고, 화면 속 17번 개체의 새잎 끝에서는 비에 젖은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두 냄새가 동시에 맞는 일은 없었다. 20분 후면 윤이삭이 온다. 그 전에 나는 라벨을 뒤집어 볼지, 보고를 먼저 올릴지 결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