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 아래의 봉투
1챕터 · AI 시작
밤 11시 8분, 인천도 아니고 서울도 아닌 부천 중동의 아파트에서 가장 늦게 마르는 곳은 욕실이 아니라 싱크대 아래였다.
내 이름은 이서후다. 2026년 3월, 이사 온 지 12일째였고, 나는 그 사실을 이 집의 냄새보다 먼저 배웠다. 아침에 물을 한 번만 써도 저녁까지 걸레 냄새가 남았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배수관이 오래돼서 그렇다고 했다. 아파트는 1998년에 지어졌고, 전 세입자는 4개월을 못 채우고 나갔다고도 들었다. 그 말이 특별하게 들리진 않았다. 나는 원래 오래 사는 쪽이 아니었고, 계약서에 적힌 2년이 실제로 2년이 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싱크대 문짝 안쪽이 늘 아주 조금 벌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발로 밀어 닫아도 다음 날이면 2cm쯤 다시 떠 있었다. 경첩이 헐거운가 싶어 손으로 눌러 봤지만, 닫히는 힘은 멀쩡했다.
처음 봉투를 본 건 그 12일째 되는 밤이었다. 분리수거를 미루다가 종량제봉투를 꺼내려 싱크대 아래를 열었는데, 세제 통 뒤에 갈색 서류봉투가 하나 서 있었다. 얇고 길쭉했고, 우편번호 칸이 있는 아주 오래된 종류였다. 앞면에는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지만, 손에 들자 안에서 종이가 한 장 미끄러졌다. 접힌 A4였다. 젖은 것도 아닌데 모서리가 눅눅했다. 거기에는 같은 문장이 볼펜으로 6번 적혀 있었다.
물을 다 쓰고 나면 확인할 것.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지 않았다. 누가 장난을 치려고 두고 간 것 같지도 않았고, 전 세입자가 잊고 간 메모라고 보기에는 이상하게 현재형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미 물을 다 쓴 뒤였다. 저녁 설거지는 끝났고, 컵도 씻어 엎어 두었다. 그래서 확인할 것이 있다면 지금이어야 한다는 뜻처럼 읽혔다. 그 생각이 불쾌해서 종이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으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래층에 사는 김주란 씨였다. 이사 온 첫날 현관에서 인사한 뒤로 두 번밖에 본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름은 또렷이 기억했다. 목소리가 유난히 차분했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물 쓰셨어요?"
"네. 방금 설거지 끝냈는데요. 왜요?"
잠깐 정적이 있었고, 수화기 너머로 TV 소리 같은 게 아주 작게 들렸다. 그러다 김주란 씨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조금 일찍 들리겠네요. 놀라지 마세요. 처음엔 다 배관 소리인 줄 알아요."
나는 되묻지 못했다. 상대가 농담을 하는지, 진심인지 구분이 안 되면 목소리부터 이상해진다. 내 목소리도 그랬을 것이다. 결국 "무슨 소리요?" 하고 묻긴 했지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 화면에는 38초라고 찍혀 있었다. 다시 걸까 하다가 말았다. 아래층 사람에게 밤 11시에 집요하게 전화를 거는 쪽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나는 봉투를 식탁 위에 두고 싱크대 문을 닫았다. 문짝은 평소처럼 끝까지 닫히지 않고 1cm쯤 남겼다. 안쪽에서 뭔가 걸리는 느낌은 없었다.
그 뒤로 5분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바깥 도로에서 늦게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윗집에서 의자를 미는 둔한 소리만 들렸다. 그래서 김주란 씨가 나를 다른 집 사람이랑 착각했거나, 배관 민원 때문에 예민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주방 쪽에서, 금속이 아니라 종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였다. 봉투가 식탁 위에 있으니 그 소리는 싱크대 아래에서 나는 셈이었다. 나는 한동안 주방 불 아래 서서 귀만 기울였다. 바스락거림은 금방 멎었다가, 이번에는 아주 규칙적으로 3번 났다. 누가 안쪽에서 손바닥으로 문짝 안을 가볍게 짚는 것처럼. 그때 어머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늦게까지 안 자냐는 짧은 문자였다. 나는 화면만 내려다보다가 답장을 치지 못했다. 싱크대 쪽을 보니 문짝 아래 그림자가 조금 넓어져 있었다. 불빛 각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아까와 같았다. 싱크대 아래는 닫혀 있었고, 식탁 위 봉투는 내가 내려다보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도 젖은 행주 냄새는 점점 옅어지고, 대신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배수관에서는 날 수 없는 냄새였다. 관리사무소 야간 당직은 12분 후면 끝난다. 김주란 씨에게 다시 전화할지, 그냥 이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만 확인할지, 나는 그 둘 중 하나를 먼저 골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