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 배선함

1챕터 · AI 시작

초인종은 눌렀을 때만 울려야 했는데, 정오도 되기 전 먼저 한 번 울렸다. 8월, 대구 북구의 오래된 빌라 3층에서 이정원은 양파망을 싱크대 아래에 밀어 넣다가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멈췄다. 짧고 마른 소리였다. 한 번뿐이어서 더 분명했다. 그는 손에 묻은 양파 껍질을 앞치마에 문지르고 현관으로 갔다. 문에 달린 렌즈로 복도를 봤다. 사람은 없었다. 계단 쪽 창문만 열려 있었고, 아래층에서 점심 국 끓는 냄새가 올라왔다. 정원은 체인을 건 채 문을 조금 열어 바닥을 먼저 봤다. 광고 전단도 없었고, 택배도 없었다. 대신 문틀 옆 배선함 뚜껑이 반쯤 열려 있었다. 원래는 관리소 사람이 검은 절연테이프로 감아 둔 채였다. 안방에서는 어머니가 선풍기 바람을 등지고 누워 있다가 물었다. "누구 왔나?" "없어요. 그냥 잘못 눌렀나 봐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지난주부터 정원 누나 정미가 낮마다 와서 어머니 약을 챙기고 갔는데, 오늘은 아직 안 왔다. 정원은 배선함 뚜껑을 손가락으로 밀어 닫았다. 안쪽에는 가느다란 선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들어 있었고, 그중 하얀 선 하나만 새것처럼 밝았다. 배선이 자주 타서 해마다 복도 판넬을 갈았는데, 지난겨울에 갈고 나서는 아무도 손댄 적이 없었다. 그는 손을 떼고 다시 부엌으로 갔다. 가스불 위 냄비 가장자리에는 콩나물 거품이 붙어 있었다. 정원은 불을 낮추고 소금을 집었다가, 이미 간을 했다는 걸 떠올리고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 건 그 뒤였다. 삑, 삑, 삑, 잠깐 쉬고 다시 삑. 정미가 누르는 리듬이었다. 정원이 손을 닦으며 나가자 문이 열리고 정미가 들어왔다. 양손에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왼쪽은 약국 봉투였고 오른쪽은 시장에서 고기 담아 주는 반투명 비닐이었다. 비닐 바닥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왜 문 열어 놨어?" "안 열어 놨는데." "아까부터 그냥 밀리던데." 정미는 신발을 벗다가 말고 문을 다시 당겨 봤다. 체인이 걸리지 않은 문이 한 번에 닫혔다. 정원은 자기가 조금 전에 분명 체인을 걸어 두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뒀다. 정미는 머리끈을 풀어 손목에 감았다. 그러고는 현관 바닥을 한참 내려다봤다. "너 이거 봤어?" 정원이 고개를 숙였다. 타일 줄눈 사이에 물기가 점점이 찍혀 있었다. 신발 앞코로 생긴 자국이 아니라 동그란 점이었다. 현관에서 시작해 거실 쪽으로 이어졌고, 중간에서 뚝 끊겼다. 정미가 방금 들어오며 만든 자국은 아니었다. 정미 운동화 바닥은 마른 상태였고, 점들은 그보다 먼저 말라 가장자리만 희게 남아 있었다. 정원은 걸레를 가져오려다 멈췄다. 점들이 끊긴 자리가 어머니 방 문앞이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날개에 붙은 먼지 때문에 바람이 일정하지 않아, 한 번씩 덜컥 끊기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그대로 누워 있었고, 이불 위에 올린 손등만 나와 있었다. 정미가 약 봉투를 접어 쥔 채 물었다. "엄마, 아까 누구 왔어?" 어머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방문 쪽으로 한 번 옮겼다. "정원아. 아까 네가 또 눌렀잖아. 문 앞에서." 정원은 문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침에 들어온 뒤로 현관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엄마, 나 오늘 나간 적 없어요." "봤는데. 문 열고 서 있었잖아." 정미가 천천히 정원을 돌아봤다. 그때 닫힌 현관문 너머에서, 방금 전과 똑같이 짧고 마른 초인종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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